[ESC] 42.195·25·7···이 숫자들의 비밀

기사작성 : 2017-12-06 16:25

목소리가 들렸다.
모국어, 나의 언어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나는 엉엉 울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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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에 뉴욕시티 마라톤이 열렸다. 어쩌다 보니 출발선에 나도 있었다. 42.195㎞, 미국 사람들 단위로 26.3마일을 달려야 했다. 심장이 뛰었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여기 와도 되는 거야?

뉴욕시티 마라톤에 출전한다고 했을 때 러닝에 관심 없는 친구들도 부러워했다. ‘뉴욕’에 가니까. 하지만 나한테 중요한 건 ‘뉴욕에서 열리는 마라톤’이라는 점이었다. 뉴욕시티 마라톤은 보스턴 마라톤, 베를린 마라톤 등과 함께 세계에서 유명한 마라톤 대회다. 그래서 어느 날, 가자, 라고 마음먹었다. 생각해보니 못 갈 이유가 없었다. 러닝은 늘 해왔고, 비행기를 안 타본 것도 아니고. 결심하니 간단해졌다. 훈련을 한다. 비행기를 탄다. 끝.

그런데 내가 나가겠다고 하면, 네, 오세요, 이렇게 말하는 대회가 아니다. 기준이 까다롭다. 참가 신청서를 내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이다. 마라톤 출전 경험, 기록 등을 고려한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건 10년 전이다. 다행히 나같이 부실한 러너들을 위해 ‘추첨’이라는 제도가 있다. 그렇게 해서 8월 중순, 운 좋게도 뉴욕러닝협회(NYRR)로부터 ‘네, 오세요’라는 메일을 받았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좋아한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새벽에 메일을 확인하고 바로 접수 절차를 진행했다. 번역기를 돌려서 누리집의 영어 문장을 읽었다. 하프코스를 신청하려고 했다. 풀코스를 뛰려면 연습을 괴로울 정도로 해야 하고, 대회 때도 마찬가지로 괴롭기 때문이다. 나는 늘 이런 마음으로 러닝을 해왔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 한계에 도전하지 않는 것. 굳이 러닝을 하면서까지 한계를 시험하지 않아도, 나는 늘 시험대 위에 놓인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집에 돌아와 혼자 식탁 테이블에 붙어서 시를 쓸 때도. 달리기는 어쩌면 내가 유일하게 게으르게 하는 행위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완주 예상 시간을 기록하는 칸이 있어서 2시간45분이라고 적었다. 뭐, 이 정도면! 그리고 석달 동안 열심히 연습을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달렸다. 느리게 먼 거리를 한 번에 달리는 훈련과 빠르게 짧은 거리를 여러 차례 나누어 달리는 훈련을 번갈아 했다. 완주할 자신은 있고, 기록은 안 중요하니까, 연습을 안 해도 되지만, 연습을 많이 할수록 피니시 라인에 들어올 때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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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티켓은 왕복 92만원에 끊었고, 숙소는 마침 뉴욕에 갈 일이 있는 친구들과 함께 에어비앤비(Airbnb)를 잡아서 하루에 10만원도 들지 않았다. 다행히 이 정도 돈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뉴욕으로 출발하기 이틀 전, 곰곰이 생각해보니 신청 접수를 할 때 ‘하프코스’와 ‘풀코스’를 선택하는 항목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뉴욕마라톤협회 누리집에 들어가 자세히 보니 어디에도 그런 항목이 없었다. 뭐지? 그때부터 뉴욕시티 마라톤에 대해 조사했다. 결론은 뉴욕시티 마라톤은 봄가을에 열리며 봄엔 하프코스, 가을엔 풀코스만 모집한다. 머리가 아프고 심장이 뛰고 다리가 저렸다. 같이 달리기를 하는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부러워했다. 풀코스를 완주하는 게 더 의미 있지 않겠냐며…. 아, 스트레스. 하지만 곧 기분이 좋아졌다. 나에게 승부사 기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니면 미쳤거나.

어찌됐건 뉴욕에 갔다. 갔더니 상황이 더 안 좋았다. 하프코스 목표 기록으로 적어둔 2시간45분이 풀코스 목표 기록으로 설정돼 있어서, 나는 엘리트 선수들이 출발하고 난 후에 바로 출발해야 했다. 일반인 러너 중에선 가장 앞에서 달리는 것이다. 풀코스를 2시간대에 뛰는 부지런한 토끼들 속에서 마지막 풀코스를 10년 전에 뛴 게으른 거북이가 달리는 꼴이라니. 심지어 그때 기록이 4시간24분24초였다. 함께 간 친구들이 자꾸 엄지손가락을 세워서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그 힘조차 아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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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이 돼서 며칠 동안 큰 볼일을 못 봤다. 대회 전날 아침에 변비약을 먹었다. 밤이 되도록 신호가 없었다. 대회 열리는 날 새벽 마침내 화장실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애썼다. 달리다 힘들면 걸을 거니까. 걷다가 힘들면 포기할 거니까. 그냥 나는, 그 순간에 뉴욕에 있고, 어찌됐건 무엇인가 도전하고 있으며, 최소한의 준비나마 하기는 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나는 꽤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의 낮이 이곳의 밤이라는 점 덕분에 비로소 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업무 관련 메시지를 보내다가 내가 답을 안 하니 포기해버렸다.

대회가 열리는 스태튼 아일랜드의 집결지에 도착하니 전쟁터였다. 뉴욕주 방위군이 출동해서 출발 지역 근처를 봉쇄했다. 긴장이 됐지만 러너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대회를 앞두고 다들 행복해했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러너도 있었고 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는 러너도 있었다. 제멋대로였다.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랑은 분위기가 달랐다.

마침내 출발선 앞에 섰다. 옆에 있는 할아버지 러너가 내 어깨를 치더니 악수를 청했다. ‘굿 잡!’ 그래, 굿 잡이다. 해보는 거야!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포가 터졌다. 여기저기서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었다. 부지런한 토끼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베라자노내로스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으로 넘어가는 코스였다. 다리가, 높았다…, 거의 1마일 정도가 오르막길이었다. 비가 왔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렇게 긴 오르막길을 한 번에 달려본 적이 없었다. 춥고 배가 아팠다. 가까스로 다리를 건넜다. 2마일 지점에서 화장실에 갔다. 나는 집 화장실에서만 큰 볼일을 본다. 학교에 다닐 때도 회사에 다닐 때도 그랬다. 그날 12마일 지점까지, 매 마일마다 화장실에 갔다. 매 마일마다 이동식 화장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0.5마일마다 화장실이 있었다면 그 화장실을 전부 들렀을 것이다. 2마일 지점에서 사실상 레이스는 끝났다. 미치도록 힘들었다. 하지만 관성으로 갔다. 달리다 걷다 결국 하프코스에 닿았다. 화장실에 가도 몸에서 더 빠져나갈 게 없었다. 걷다가 힘들면 서 있었다. 서서 많은 것을 보았다. 휠체어를 타고 달리는 사람도 보았고, 시각을 잃은 ‘워커’도 보았다. 그들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나를 앞질렀고 그대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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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온통 축제였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다.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노래를 즐겁게 불렀다. 그래서 나도 어깨를 흔들며 약간의 예의를 표했다. 그 와중에도 웃음은 나왔다. 한 꼬마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가면서 남은 마일을 계산했다. 킬로미터가 아니라서 불편하고 성가셨다. 이렇게 많이 왔는데 남은 마일이 또 이렇게 많다는 게 믿을 수 없었지만 그 계산을 틀릴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몸을 조금 휘청거렸나, 달려가는 아주머니를 밀쳤다. 그녀도 힘들게 오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미안하다고 말하려는데 그녀가 먼저 말했다. “돈 스톱. 무브.”(Don’t stop. Move.) 눈물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서럽고 고맙고 아팠다. 그래서 더 갔다. 브루클린, 퀸스, 브롱크스를 지나 맨해튼으로. 누군가 바나나를 주었는데 먹을 힘이 없어서 쥐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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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선이 있는 센트럴파크에 도착하자 23마일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3.3마일이 남았다. 그때부터 레이스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거리가 줄지 않았다. 24마일 표지판을 확인하고 25마일을 향해 가는 길이 가장 힘들었다. 가도 가도 표지판이 안 보여서, 아 이제 결승선까지 표지판이 없나 보다, 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가고 있는데 25마일 표지판이 나타나서 완주고 뭐고 그길로 집에 가고 싶었다. 서럽고 화났다. 눈물이 났다. 쏟아졌다. 하지만 추슬렀다. 그때는 그저 힘들어서 우나 보다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힘들다고 이야기할 대상이 나 자신밖에 없어서 울었던 것 같다. 달릴 때 길 위에선 나밖에 없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보거나 다른 사람 이야기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내 레이스는 100% 내 몫이기 때문이다. 게으른 러너지만 그럼에도 러닝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 순간 막연히 깨달았던 것 같다. 러닝은 나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밤이었다. 응원하는 사람은 더 많아졌다. 박수 치고 힘내라고 소리쳤다. 그들이 내 레이스를 존중한다는 게 느껴졌다.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걸어가는 사람도 나를 앞질렀다. 상관없었다. 나는 나만의 레이스를 펼칠 뿐이었다. 드디어 ‘피니시 라인’이 보였다. 공중에 설치된 시계에 5시28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9시50분에 출발했으니 7시간을 넘게 달리고 있었다. 형편없는 기록이었다. 친구들 목소리가 들렸다. 모국어, 나의 언어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나는 엉엉 울었다.




글=한겨레 사설 '[ESC] 42.195·25·7···이 숫자들의 비밀' 기사 발췌.
사진=김태선(반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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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by 이우성

<러너스월드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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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스월드 코리아>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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